여섯살 즈음의 크리스마스였을까. 저녁 늦게 어디론가 나갔다 들어 온 엄마의 손엔 미미 인형 세트 하나가 들려져 있었다. 엄마는 인형 세트를 나에게 건네면서 이렇게 말했지.


"엄마가 길 가고 있었는데, 요 앞에 세워둔 차 뒤에서 산타할아버지가 엄마를 몰래 부르는거 있지. 너한테 이거 주라고 하던데!"


믿었냐고? 물론, 믿었다. 이런 허술하기 그지없는 거짓말을 그것도 철썩같이! 지금 생각하면 요즘의 여섯살들은 산타 할아버지를 믿을까, 심히 궁금해지지만 내 기억에 의하면 적어도 난 여섯살까진 믿었었나보다. 그럼 대체 난 언제부터, 대체 무슨 일로 산타 할아버지나 크리스마스 따위와 관련된 이야기들을 더 이상 믿지 않게 되었나, 생각해보니 거기에 관해서 생각나는 건 또 아무것도 없는 거다. 나도 모르는 새 산타 할아버지는 내게서 사라져 있었고 그는 진짜가 아니라고, 그냥 믿었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면 산타 할아버지가 없다는 건 누가 증명할 수 있는 걸까. 없다는 걸 확인한 사람이라도 있단 말일까. "산타 할아버지는 이 세상에 절대로 없어요!!!!!"라고, 느낌표를 한 다섯개 이상은 달고 있는 어투로 확신에 차서 말 할 수 있는 사람 말이다. 적어도 내 주변엔... 음, 없다. 그런데도 나는 산타 할아버지는 세상에 절대 없다고 오늘까지 믿고 있다. (적어도 이 글을 쓰며 여기에 대해서 생각이란 걸 해보기 전까진) 결국에 산타 할아버지는 진짜 있다고 확신할 수도 없지만, 절대 없다고 확신할 수도 없는 뭐 그런 존재인거다. 그말은 곧 산타 할아버지는 있다고 믿어도 된다는, 믿지 않을 필요는 없다는 그런 말이다.


크면서 무언가를 더 이상 믿지 않게 되는 경우가 참 많은데, 그런 경우의 대부분은 나이가 들고, 머리가 크면서 새롭게 배운 지식 덕분에 진짜 사실(검증받은 진짜 리얼 팩트!)을 알게 되면서가 아니라  '동심은 사라지고, 동화는 유치해지고, 현실을 직시해야만 하면서' 시작된다. 어린애가 아닌 이상 굳이 믿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어른은 꿈과 희망이 아니라 현실을 살아가야 하니까.


산타 할아버지를 더 이상 믿지 않는 고등학생이 된 이후 봤던, 적어도 나에겐 최고의 애니메이션이던 '폴라 익스프레스'가 12월 보다 한 달 일찍 떠오른 건 '빅피쉬' 때문이었다.




아버지가 말해주는 허무맹랑한(아들이 느끼기에) 과거사들, 흡사 왕족 신화 같은(아들이 느끼기에) 자신의 출생 이야기,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나 일어날 법한(아들이 느끼기에) 아버지의 청년기 등등등. 아들은 평생 단 한번도 아버지가 자신에게 진짜 사실을 이야기 해준 일은 없다고 생각한다. 아들에게 아버지는 언제나 말도 되지 않는 이야기만 하는 '이야기꾼'일 뿐이다.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동화나 상상 속에 존재하는 것들 뿐이다.


하지만, 아버지가 하는 모든 이야기들이 진짜인지 거짓인지 아들은 알 수 없다. 진짜라는 걸 확인할 수도 없지만, 가짜라는 걸 확인 할 수도 없다. 그래도 아들은 믿지 않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아버지의 이야기는 꿈과 희망으로 가득 찬 동화 같은 것들이고, 자신은 더 이상 어린 아이가 아니기 때문이다. 어른이 된 아들은 그것이 진짜가 아니란 것쯤은 당연히 안다. 아니, 당연히 아니라고 생각하는 게 정상이라고 믿는다.


꿈, 동화, 상상, 공상, 파란 나라. 지금은 믿지 못할 이야기가 되어버린 것들을 당연하게 믿었던 어린 시절, 생각해보면 그때의 내 주변엔 참으로 예쁘고, 신기하고,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던 것들이 많았다. 크리스마스에는 산타 할아버지가 나눠주는 선물에 내 친구들 모두가 기뻐할 것 같았고, 숲이 우거진 어디론가 놀러가면 말하는 토끼가 한 마리쯤은 날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았고, 우리 아빠엄마도 내가 지금 느끼는 이 설렘과 호기심에 깊은 공감을 가지고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을 믿지 않게 되면서 예쁠 것들도, 신기할 것들도, 날 행복하게 만들어 줄 것들도 점점 줄어갔다. 어쩌면 좀 더 꿈을 꿀 수도, 희망을 가질 수도 있을텐데.


'폴라 익스프레스'를 타고 크리스마스 여행을 했던 주인공은 어른이 되어서도 크리스마스 트리 방울의 딸랑거리는 소리를 여전히 듣는다. 반대로 주인공 동생의 귀에는 어느 순간부터 트리 방울의 딸랑거림이 들리지 않는다. 이 둘의 차이는 딱 하나였다. 산타 할아버지를, 크리스마스의 모든 것들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 가져도 될 동심을 '간직하느냐, 버리느냐'.


믿을 수 없긴 하지만, 믿지 않을 이유도 없는 이야기들. 이 이야기들이 진짜일지, 거짓말일지는 모두 우리가 믿느냐, 믿지 않느냐에 달렸다. 좀 더 꿈을 꿀 수 있다면, 좀 더 세상을 살아가는 힘을 얻게 된다면, 그렇다면 좀 더 믿어봐도 되지 않을까. 유치뽕짝 초딩 소리 따위야 뭐 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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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지점프를 하다

좋아해 1 2013. 10. 30. 01:07


1.


사랑이라는 단어에 대해선

운명, 인연, 첫눈에 반하는 것 따위는 믿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


첫 장면에서 배경에 어쩐지 이건 정말 우리나라에서 있을 수 없는 지형이라 생각했다.

엔딩에서 의문 해결



3.


혹여나 정말 혹여나 내가 운명, 인연, 첫눈에 반하는 것 따위를 믿는 사람이라 할 지언정,

극중 인우, 현빈이었다면 난 그 모든 걸 모른척 했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라도 다시 만나야 할 만큼 용기가 없다.



4.


영화 톤이 참 예쁘다. 영화 내용을 톤으로 나타낸다면 정말 딱 이 톤일거야, 그런 생각이 드는.

이야기를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톤은 보는 사람이 그 이야기에 무한대로 공감하게끔(실제로는 그렇든 아니든) 만든다.


정말 모든 걸 만드는 건 분위기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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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목소리가 들려


1. 제일 먼저 생각나는 건 역시나 사랑이다. 이별 후 잊지 못한 옛연인의 목소리가 아직도 귓전을 맴돈다는 그런 뉘앙스적인 뉘앙스가 느껴진달까. 역시나 이런 아련 톡톡한 문장에는 사랑이 제일 처음이지.


2. 이건 작년에 콘서트 갔다가 델리스파이스의 차우차우를 커버곡으로 부른 뮤지션한테 직접 들은 이야기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차우차우 가사를 1번처럼 아련 톡톡 사랑 노래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건 그게 아니라 듣기 싫은 말이 자꾸만 들려오는 상황을 묘사한거라고 했다. 그러니까 차우차우는 개 품종 중 하나인데... 그러니까 차우차우 목소리가 자꾸 들려 온다고... 그러니까 곧 개소리가 자꾸만 들린다고..... 결론적으로 개소리 하지 말라고. 요즈음 기내방송이나 호텔 주차장, 우유 대리점에서 BGM으로 쓰면 잘 어울릴 것 같은 노래다. (마지막 두 문장 쓰고 내가 마치 키보드 워리어가 된 느낌을 받았다. 헛!)


3. 새로 시작된 드라마에서는 말 그대로, 문자 그대로 '너의 목소리가 들리'는 상황을 보여준다. 가만히 있어도 다른 사람 속마음이 자꾸만 목소리로 들리는 주인공. 정말 일차원적인 해석임에도 불구하고, 세 가지 해석 중에서 가장 팬타씨-하다. 궁금하고 흥미로우면서도 가지고 싶지 않은 능력이다. 주인공처럼 나도 남 생리 날짜 따위까지 일일이 다 알고 싶진 않거든. 타인의 밀실은 궁금증을 유발하는 장소지만, 확실히 그 선이 존재하는 것 같다. 1층까지는 좋은데, 지하까지는 내려가보고 싶지 않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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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reat, 위대한

좋아해 1 2013. 5. 28. 00:32


"난 우리가 범죄자라고 생각 안 해요. 난 내가 지금 너무 자랑스러워요. 우리가 너무 큰 일을 해낸 것 같아요."

마이클 치미노의 영화 <대도적> 에서 은행을 터는 것에 성공한 도둑이 엔딩 장면에서 차를 타고 도망가는 도중에 한 대사다. 은행털이가 되기 전, 그는 집도 절도 없는 빈털털이에다 장애까지 가진 절름발이였다. 세상에서 그에게 관심을 가져주는 이라곤 아무도 없었다. 사회에 그 어떤 영향도 끼칠 수 없는 존재, 어쩌면 세상에 아무 짝에 쓸모없는 존재. 그는 스스로도 자신을 그렇게 평가했다. 그랬던 그가 은행 털었다. 그것도 아주 큰 은행을.

수십, 수백 명의 경찰들은 오로지 그를 잡기 위해 동원되었고, 하룻밤 사이에 그는 세상을 발칵 뒤엎을 일을 저지른 '유명인'이 되어 있었다. 그에게 도둑질은 나쁘고 아니고를 따져야 할 도덕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었다. 좋든 나쁘든, 도둑질이라는 행위는 그가 세상의 중심에 설 수 있게 해 준 사건이었다. 그 아무도 감히 털지 못할 은행을 자신이 성공적으로 털었다는 사실, 그 사실에 모두가 주목하고 있는 상황. 그것은 세상에 대한 자신의 증명이 아니었을까.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에서 잡화점에 모여 든 세 명의 도둑들을 보며 <대도적>의 절름발이가 떠 오른 것은 단지 그들이 도둑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우연히(소설을 끝까지 읽고 나면 이것이 결코 우연이 아니었음을 알게 된다.) 날아 든 고민상담 편지를 받고, 그들이 사람들의 인생 상담을 해주어야겠다, 결심하게 된 계기가 <대도적> 절름발이의 마음과 너무나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별 볼 일 없는 것처럼 생각되던 자신들에게 고민을 털어 놓고 답을 구하는 사람들을 보며, 자신들도 누군가의 인생에, 세상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중요한 존재가 될 수도 있음을 느낀다.

있으나 마나, 세상의 티끌 정도로 스스로를 평가하던 인물들이 특정한 사건을 통해 자신의 존재의 중요성을 각인하게 된다는 점에서 두 작품의 도둑들은 같은 선상에 있었다. 다만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의 도둑들은 우연찮게 '다른 누군가의 삶에 자신들이 힘과 위로가 되어줄 수 있었던 희망적인 상황'을 만나, 썩 괜찮은 방법으로 스스로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었고 반면, <대도적>의 절름발이에게는 그러한 희망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을 뿐이다. 절름발이는 비도덕한 이슈 메이커가 되어 스스로를 증명할 수밖에 없었다.

이 두 상황의 차이는 어쩌면 작가가 세상을 인식하는 방법을 드러낸다고 볼 수 있겠다. <대도적>의 감독 마이클 치미노가 세상의 절망을 피력하는 스타일이라면,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의 작가 히가시노 게이고는 그래도 존재하는 세상의 희망을 믿는 스타일 같달까.

물론, 세상에는 <대도적>의 경우가 훨씬 많다. 절름발이의 대사를 들으며 신문, 뉴스를 도배하던 진짜 범죄자들이 자연스럽게 떠올랐으니. 극악무도한 범죄를 저지른 범죄자가, 두손이 꽁꽁 묶인 채 법원으로 끌려 들어가는 상황에서 카메라를 보며 씨익 미소짓던 모습은 정말 꼭 절름발이를 보는 듯했다. 그가 절름발이가 된 건, 개인만의 문제였을까. 정말 우리는 아무런 잘못이 없는 걸까.

최근 영화로도 개봉한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의 개츠비 역시, 어찌보면 이 도둑들과 다름없는 인물이란 생각이 들었다. 문명, 물질, 계급, 권력, 돈 따위로 인간의 본성을 규정짓는 사회에서 철저한 외면과 고독을 경험한 인물들. 개츠비는 그 중에서 가장 성공한 방법으로 자신의 증명을 보인 셈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성공이란 것은 물질 사회가 규정지는 의미에서의 성공이다. 개츠비는 사회가 열광하고 환호하는 가장 최상의 방법, the great한 방법으로 세상에 자신을 증명했다.

소외... 결국, 물질에 기초한 인간 소외라는 것이 이 모든 유형의 인물들을 만들어 낸 시작이었다. 조금 착한, 많이 나쁜, 아주 위대한 각자 다른 결말을 만난 건 운이 조금 더 있고 없고의 문제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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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리 카르티에-브레송 展 <결정적 순간>

2012.05.19(토)~2012.09.02(일)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미술관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사진전에 다녀왔다.

이름만 듣고는 누구지...하던 사람들도 그의 대표작을 보고 나면 아...할 것 같다. 어디선가 한 번쯤은 봤을 법한 사진.



카르티에-브레송은 사진에 제목을 달지 않는다고 한다. 단지 어느 장소에서 찍은 것인지만 기록해 두기 때문에 모든 사진에는 제목 대신 나라 혹은, 도시의 이름이 붙어있다. 파리의 생-라자르 역 뒤에서 찍었다는 이 사진은 카르티에-브레송 앞에 늘 따라 붙는 수식어 '찰나의 미학'이 가장 잘 드러나는 사진이다. 점프하는 사람의 두 발이 모두 허공에 떠 있는 몇 초의 순간. 아마 따지면 몇 초도 아닌 영 쩜 몇몇 초 일지도 모른다. 왠종일 음울했던 역 뒤편에 즐거운 리듬감이 생겨나는 그 잠시나마의 순간을 카르티에-브레송은 포착했다. 전체는 우중충하지만 어딘가 생기발랄한 그런 아이러니한 위트. 꼭 대표작이 아니었더라도, 유명한 사진이란 걸 모르고 봤더라도 난 아마 이 사진을 무척 마음에 들어했을 것 같다.


카르티에-브레송은 찰나의 미학, 순간의 미학을 '잘 포착하는' 능력을 가진 작가였다. 하지만 '잘 포착하기' 이전에 '잘 기다릴 줄 아는' 작가였다. 잘 기다린다는 건 실로 엄청난 능력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기다림은 너무 어렵다. 그래서 우리는 시공간 속으로 들어가 장면을 연출한다. 카르티에-브레송은 풍경에서 혹은, 인물에서 느껴지는 특별한 감성을 찾아내고 무엇을 찍을지 결정하고 나면, 원하는 구도에 렌즈를 댄 채 그저 조용히 기다린다. 드러내고자 하는 내용에 가장 적합한 구성이 만들어 질 때까지. 그리고 공간이 완성되는 바로 그 순간, 셔터를 누른다. 그는 시공간으로 들어가지 않고, 시공간이 그의 렌즈에 들어오게 만든다.


그래서 내가 말하고 싶은 점은! 카르티에-브레송의 순간들은 모두 연출도, 그렇다고 우연도 아니었다는 거다. 기가 막히게 좋은 사주를 타고 태어나서, 어딜가서 어느 순간 뭘 찍든 작품이 될 수밖에 없는 순간들이 그의 렌즈에 우연히 포착된 게 아니다. 적당한 때가 올 때까지 기다리고, 또 기다려 담아낸, 진실된 찰나의 순간이다.


이런 장점이 잘 느껴지는 사진은 대표작 말고도 많았지만, 가장 좋았던 건 타라스콩...?(tarascon인데 프랑스의 지명인 것 같다. 뭐라고 읽어야 할 지 잘 모르겠다... 하하)


오르막을 오르는 노인과 내리막을 내려가는 두 명의 소녀. 하지만 빛이 비추는 건 노인이다. 그래서 우울하지가 않다.

셔터를 조금만 빨리 눌렀다고 가정해보자. 노인과 소녀들의 위치는 뒤 바꼈을 것이다. 어두운 그림자 속에서 오르막을 오르는 무기력한 노인과 밝은 빛 속에서 내리막을 내려가는 생의 활기를 가득 품은 소녀들이 찍혔겠지. 그건 정말이지 우울하지 않나.

브레송의 찰나에는 분위기를 전환시키는 이런 센스가 있다.


풍경 사진만 집중해서 말했지만, 이번 사진전에서는 보도사진과 인물사진 등도 만날 수 있다. 특히, 잘 기다릴 줄 아는 그의 능력은 인물 사진에서도 잘 통했다. 브레송은 인물의 일상을 함께하며 그/그녀의 성격과 생활 방식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그 순간에 셔터를 누른다. 그의 인물 사진에는 사람의 내면적 감성묻어 난다. 예컨데 브레송이 찍은 사람 중에는 세상에서 가장 낭만적인 키스 장면을 찍었다는 사진가가 있었다. 난 분명 그 키스 사진을 본 적도 없는데, 문득 이 사람이 찍은 키스 사진이 세상에서 가장 낭만적인 장면이 맞을 것만 같은 그런 기분이 드는 거다.


그 사진가의 얼굴이 궁금하다면, 네이버 검색!을 말고 전시회 가보면 좋을 듯 하다. 특히, 인터넷이나 여타 화면에서 그의 사진을 보면 미세하게 명암이 다른데, 흑백 사진에서는 그 미세한 명암이 어마어마한 차이를 만들어 낸다. 화면이 조금만 밝아도, 조금만 어두워도 많은 부분이 묻혀 보이지 않는 게 흑백사진이다. 전시장에 가면 그의 섬세한 인화 실력(?)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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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메테우스

좋아해 1 2012. 6. 20. 00:53



좋았는지 싫었는지 볼 만했는지 돈 아까웠는지

이런 것들은 일단 각설하고...

일번, 최근 과학 교과서에 시조새를 삭제해달라는 청원과 관련하여 진화론 vs 창조론 분쟁이 한창인 지금, 이런 영화가 상영중이라는 사실이 참으로 흥미롭다.

줄거리만 얼핏 보면 감독은 일단 창조론 편에 서 있는 것 같다. 특히, 끝끝내 십자가 목걸이를 되찾고야마는 여주인공의 모습은 창조론 중에서도 기독교적 창조론에 손을 들어주려는 걸로 보인다. 그런데 조물주 찾아 우주로 떠나다간 비극적인 최후만 맞이 한다는, 그러니까 찾으러 오지 말라는 결말은 어찌보면 세계 인류 평화를 위해서 오히려 진화론이 맞는게 나을지도 모른다는 그런 말처럼 들리기도 한다.

이번, 참으로 이성적이고도 논리적인 과학자들이 '어느 날 뚝딱!하고 인간을 창조한 조물주'를 찾아 우주로 떠난다는 사실은 어딘가 흥미롭지 않은가.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동시에 과학자의 길을 걷고 있는 사람은 창조론을 믿을까, 진화론을 믿을까.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리는 영화 중 하나인 것 같은데, 난... 극단적인 불까지는 아닌듯 합니다.

흥미로워... 흥미 투성이인 영화야...

그러나 오늘 밤 좋은 꿈을 꾸지는 못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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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김살 없는 사람'을 좋아하는가?


사람을 좋아하는 이유에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그 중 '구김살 없어 좋다'는 건 조금 특별한 이유가 아닐까 싶다.

사람들은 어른이 되어가며 세상이 결코 호락호락하지만 않다는 걸 알게 된다. 버석버석한 일상에 인상 찡그리는 일도 많아지고 사춘기를 지나면서 줄어 들었던 욕이 다시 늘기도 한다. 어른이 되면 뭐든 다 할 수 있을 것만 같던 어린 시절과는 다르게 어른이 된 우리는 진짜 세상과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렸을 적 그때처럼 '세상은 참 아름다운 것 같아!'를 여전히 외쳐주는 사람. 24시간 내내 해피바이러스를 내뿜으며 주변 사람들까지 행복하게 해 주는, 마냥 해맑게 웃어주는 사람이 바로 '구김살 없어 보여 좋은 사람'이다.

그래서 구김살이 없지 않은 나같은 보통의 사람들은 이런 부류의 사람을 너무나 좋아하지만, 동시에 가끔 얄미워 하기도 한다. 세상의 밝은 단면만 보고 자란 그들은 내가 왜 구김살이 생길 수 밖에 없었는지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페퍼톤스의 노래를 사람에 비유하자면 바로 이 '구김살 없어 보여 좋은 사람'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페퍼톤스의 노래는 구김살이 없는데, 얄밉지도 않다.

'우울증 극복을 위한 뉴테라피 2인조 밴드'를 지향하는 그들은 마냥 "즐거워! 신나! 행복해!"를 외치지 않는다.

사람의 우울함을 위로해 주는 데 필요한 것은 일단은 '공감'이다. 세상의 어두운 단면은 무작정 덮어 놓고 밝은 면만 보여준다고 우울함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당신이 왜 우울한지를 이해하고, 공감해 주고, 같이 이겨내자 손 내밀어 주는 위로. 구김살 없어 좋은 페퍼톤즈의 노래에는 듣는 이를 위로하는 이런 섬세한 마음이 담겨 있다.



최근 발매한 페퍼톤스 4집 <Beginner's Luck> 역시 새롭게 시작하는 사람들을 경쾌하고, 밝게 응원해주고 있다. 헤어지는 순간을 새로운 시작으로 활기차게 위로하는 노래! 타이틀곡 <행운을 빌어요>는 제목서부터가 진짜 행운을 빌어 줄 것만 같은 느낌이다. (하하)

개인적으로는 8번 track <BIKINI>, 9번 track <바이킹>을 좋아해요.

아련하고 먹먹한 순간, 지치고 퍽퍽한 날들의 감성을 그들만의 신나는 사운드로 위로하는 페퍼톤스! 뉴테라피가 확실합니당.

진짜 세상에 한발, 한발 더 가까이 다가갈수록 점점 더 나에게 소중해지는 것 두 가지가 있다면, '구김살 없어 좋은 친구'와 '구김살 없어 좋은 페퍼톤스의 노래'. 앨범 자켓까지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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