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이 운치있는 말
마포구에 있는 당인리 발전소를 따라 걷다보면, 길을 칼로 나눠 자른 듯 경계를 짓고 선 구역이 나타난다. 상수역부터 그곳까지는 벚꽃나무가 만개한 반면, 거기부터 반대편 길 끝까지는 아직 초록 싹도 거의 트지 않은 나무들이 줄지어 서있다. 길 끝에 닿아갈수록 햇빛 드는 양이 서서히 줄어 들어, 개화시기 또한 늦어지는 것이라 한다. 다른 길은 꽃놀이로 한창일 때, 아직 휑한 티를 벗지 못하는 것이 썩 애틋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꽃이 가장 늦게 피고 지는 길'로 나름 유명세(?)도 탄다하니 꼭 나쁜일만은 아니다.
꽃이 피고 지는 일에서는 맨 처음 꽃이 피는 곳 못지 않게, 맨 마지막에 꽃이 지는 곳 또한 많은 의미를 가진다. 그만큼 사람들의 관심도, 사랑도 많이 받는다. 비단 꽃만이 아니다. 해가 가장 늦게 뜨고 지는 곳도 그렇고, 얼음이 가장 늦게 어는 곳, 녹는 곳도 그렇다. 자연에서 '가장 빠른 것'이 화려함으로 소란스런 주목을 받는다면, '가장 느린 것'은 묘한 애잔함으로 조용히 주목 받는다.
'늦은'이라는 이 운치있는 단어는 유독 사람에게만 붙으면 부정적인 수식어가 된다. 늦은 졸업, 늦은 취업, 늦은 합격, 늦은 승진. 심지어 남녀의 만남에서도 '노처녀, 노총각'이라는 단어를 들이밀며 혼인의 적당한 시기를 잰다. 이른바, 결혼적령기. 시간에 맞추어 정해진대로 살 지 못하면 '늦은' 사람이 되어버리는 이 세상에서 '다만 조금 늦게 걸을 뿐이다'라는 말이 더이상 위로가 되지 않는 건 나 뿐일까. 내가 이미 삐딱한 청춘이 되어버려서일까.
'자연의 이치'라는 말은 요즘 사람들에게 꽤나 촌스럽고 원초적인 말로 들릴지도 모른다. 자연의 말로는 더 이상 설명되지 않는, 설명하려하지 않는 것이 요즘 사람들이다. 가장 빠른 것만큼 아름다운 의미를 가진 가장 느린 것들. 사람이 자연의 일부를 벗어날수록, 자연의 이치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더 많아질테다. 요즈음 사람들은 너무 스마트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