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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reat, 위대한

긴목을모글리 2013. 5. 28. 00:32


"난 우리가 범죄자라고 생각 안 해요. 난 내가 지금 너무 자랑스러워요. 우리가 너무 큰 일을 해낸 것 같아요."

마이클 치미노의 영화 <대도적> 에서 은행을 터는 것에 성공한 도둑이 엔딩 장면에서 차를 타고 도망가는 도중에 한 대사다. 은행털이가 되기 전, 그는 집도 절도 없는 빈털털이에다 장애까지 가진 절름발이였다. 세상에서 그에게 관심을 가져주는 이라곤 아무도 없었다. 사회에 그 어떤 영향도 끼칠 수 없는 존재, 어쩌면 세상에 아무 짝에 쓸모없는 존재. 그는 스스로도 자신을 그렇게 평가했다. 그랬던 그가 은행 털었다. 그것도 아주 큰 은행을.

수십, 수백 명의 경찰들은 오로지 그를 잡기 위해 동원되었고, 하룻밤 사이에 그는 세상을 발칵 뒤엎을 일을 저지른 '유명인'이 되어 있었다. 그에게 도둑질은 나쁘고 아니고를 따져야 할 도덕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었다. 좋든 나쁘든, 도둑질이라는 행위는 그가 세상의 중심에 설 수 있게 해 준 사건이었다. 그 아무도 감히 털지 못할 은행을 자신이 성공적으로 털었다는 사실, 그 사실에 모두가 주목하고 있는 상황. 그것은 세상에 대한 자신의 증명이 아니었을까.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에서 잡화점에 모여 든 세 명의 도둑들을 보며 <대도적>의 절름발이가 떠 오른 것은 단지 그들이 도둑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우연히(소설을 끝까지 읽고 나면 이것이 결코 우연이 아니었음을 알게 된다.) 날아 든 고민상담 편지를 받고, 그들이 사람들의 인생 상담을 해주어야겠다, 결심하게 된 계기가 <대도적> 절름발이의 마음과 너무나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별 볼 일 없는 것처럼 생각되던 자신들에게 고민을 털어 놓고 답을 구하는 사람들을 보며, 자신들도 누군가의 인생에, 세상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중요한 존재가 될 수도 있음을 느낀다.

있으나 마나, 세상의 티끌 정도로 스스로를 평가하던 인물들이 특정한 사건을 통해 자신의 존재의 중요성을 각인하게 된다는 점에서 두 작품의 도둑들은 같은 선상에 있었다. 다만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의 도둑들은 우연찮게 '다른 누군가의 삶에 자신들이 힘과 위로가 되어줄 수 있었던 희망적인 상황'을 만나, 썩 괜찮은 방법으로 스스로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었고 반면, <대도적>의 절름발이에게는 그러한 희망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을 뿐이다. 절름발이는 비도덕한 이슈 메이커가 되어 스스로를 증명할 수밖에 없었다.

이 두 상황의 차이는 어쩌면 작가가 세상을 인식하는 방법을 드러낸다고 볼 수 있겠다. <대도적>의 감독 마이클 치미노가 세상의 절망을 피력하는 스타일이라면,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의 작가 히가시노 게이고는 그래도 존재하는 세상의 희망을 믿는 스타일 같달까.

물론, 세상에는 <대도적>의 경우가 훨씬 많다. 절름발이의 대사를 들으며 신문, 뉴스를 도배하던 진짜 범죄자들이 자연스럽게 떠올랐으니. 극악무도한 범죄를 저지른 범죄자가, 두손이 꽁꽁 묶인 채 법원으로 끌려 들어가는 상황에서 카메라를 보며 씨익 미소짓던 모습은 정말 꼭 절름발이를 보는 듯했다. 그가 절름발이가 된 건, 개인만의 문제였을까. 정말 우리는 아무런 잘못이 없는 걸까.

최근 영화로도 개봉한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의 개츠비 역시, 어찌보면 이 도둑들과 다름없는 인물이란 생각이 들었다. 문명, 물질, 계급, 권력, 돈 따위로 인간의 본성을 규정짓는 사회에서 철저한 외면과 고독을 경험한 인물들. 개츠비는 그 중에서 가장 성공한 방법으로 자신의 증명을 보인 셈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성공이란 것은 물질 사회가 규정지는 의미에서의 성공이다. 개츠비는 사회가 열광하고 환호하는 가장 최상의 방법, the great한 방법으로 세상에 자신을 증명했다.

소외... 결국, 물질에 기초한 인간 소외라는 것이 이 모든 유형의 인물들을 만들어 낸 시작이었다. 조금 착한, 많이 나쁜, 아주 위대한 각자 다른 결말을 만난 건 운이 조금 더 있고 없고의 문제였을까.